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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과 인디언의 대립의 시작

16세기, 유럽을 떠나 미대륙에 정착한 기독교인들은 해안의 풍요로운 자원을 목적으로 점차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일부 부족은 수달이나 비버 가죽을 필요한 물건과 교환했고, 빵과 브랜디를 얻기도 하였다. 문화충격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문명화된 백인들의 문화는 인디언들에게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의 전환을 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선원들은 인디언을 하인처럼 잔인하게 다루었고 아녀자를 겁탈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인디언은 백인들을 피해 숲 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살게 되었다.
1607년에는 영국인 144명이 정착하여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의 영국인 마을을 만들고 제임스타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620년대에 이르러서는 네델란드인들과 영국인들의 이주가 늘게 되었다. 영국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뉴잉글랜드에 도착했고, 가난한 이주민들을 태운 네델란드 선박들이 뉴암스테르담에 당도했다. 낯선 환경에 무일푼으로 도착한 이주자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디언들이 지니고 있던 자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인디언들은 새로운 이주민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하였으나, 선택된 민족으로서 신으로부터 이 땅에 가치를 부여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한 이 청교도들은 점차 인디언들에게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백인들은 인디언의 사냥감과 옥수수를 얻기 위해 마을의 약탈과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1622년, 백인들의 가혹행위와 파괴로 인해 분노가 극에 달한 포우하탄족의 공격을 시작으로 백인과 인디언의 오랜 싸움이 시작된다.
문명화된 무기로 무장한 백인의 군대를 인디언이 이기기는 역부족이었다. 인디언들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백인들에 대항하여 1763년 폰티악 추장이 이끄는 폰티악 반란, 1862년 샌티 수족의 전투, 제로니모가 이끌었던 아파치 게릴라 전투 등 인디언들은 끊임없이 투쟁하였으나 남은 것은 수많은 희생과 영토를 양도하라는 조약들 뿐이었다. 그리고 1636년에 800여명의 인디언이 살해당했던 피쿼트족 학살사건을 필두로 600여명의 희생자를 낳았던 1864년의 샌드크리크 학살사건 등 크고 작은 수많은 학살은 당시 인디언들을 제압하고자 하였던 백인들의 잔인성을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