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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행진

행진의 배경

1963년 흑인들의 실업률은 11%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 백인들의 실업률은 5%에 불과했으며 백인 가정의 연평균 수입은 6천5백$정도임에 비하여 흑인 가정의 연 평균 소득은 3천 5백$정도였다.
1941년 워싱턴 행진을 계획하였던 필립 랜돌프는 흑인 시민들이 공정한 대우와 공평한 기회를 기다리는데 피곤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전국적인 워싱턴 행진의 실행을 다시 한번 결심하게 된다. 브라운 판결 9년 후, 미국은 격렬한 인종소요를 앓고 있었고 1963년 초 발생한 버밍햄에서 시위자들에게 발생한 폭력적인 공격이후 이 행진은 상당한 의미를 가졌다.
랜돌프와 그의 동료 바이아드 러스틴(Bayard Rustin)은 8월 28일 행진을 계획하기 위해 노동자와 민권 지도자들을 만나 다음과 같은 행사의 목적에 의견을 일치하였다.
민권법의 통과를 위한 요구 제시, 연말까지 공립학교에서 흑백 분리의 폐지, 직업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공정 고용 실행법의 제정, 그리고 직업훈련과 직업소개를 위한 동등한 권리의 요구 등이다.

행진의 전개

행진의 주제는 단결, 인종화합, 그리고 특히 민권법안의 통과를 소리 높여 주장하는 일명, “자유와 직업을 위한 행진”이었다. 참가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지방 민권단체와 교회별로 참가하였고 “자유의 버스”들은 전국 각지에서 참가자들을 수송하였다. 조직원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25만 이상의 사람들 -그들 중 6만 명은 백인들- 이 모여들었다.
필립 랜돌프의 연설로 시작된 이 행사에서 그간의 민권운동이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다른 단체들과의 연합이 견고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여실히 나타났다. 행사 하루 전날 배포된 연설문의 사본 중 SNCC의 존 루이스의 연설문이 너무 과격하다고 조직위원회가 수정을 요구했고, 더욱이 페트릭 오보일 대주교는 루이스의 연설문이 수정 없이 발표된다면 행진에서 철수할 것이라 위협하기도 했다.
이어서 가장 인기있는 민권 지도자인 킹 목사는 전국에 걸친 텔레비젼 방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의 가장 호소력 있고 가장 인상 깊은, 흑인들과 백인들은 평화 속에서 함께 살수 있다는 믿음의 연설을 했다.

행진의 결과

이 행사는 널리 알려진 성공이었고 방송매체에 의해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심각한 방해도 발생하지 않았고 많은 미국민들은 처음으로 흑인과 백인 시민들이 단결하여 나란히 행진하고 축복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하지만 일단의 급진적이고 젊은 흑인들은 행진과 킹 목사의 연설이 그들이 기대하였던 조속한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미온적인 행사의 성격을 비난하였다.

워싱턴 행진에서 많은 미국민들은 그날 전례 없었던 장엄한 순간을 목격하였고 워싱턴행진이 이전에 민권운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나 민권운동으로 인하여 위협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흑백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열렬한 분리주의자들은 이러한 화합적인 분위기에 아무런 변화도 나타내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