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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여행단 운동

운동의 배경

1961년 3월 13일, 인종평등회의(CORE)의 제임스 파머는 남부 전역의 주간 운송터미날에서 인종차별의 실태를 파악하고자 자유여행단의 조직을 제의하였다.
3개월 전, 대법원은 보이튼 대 버지니아(Boyton vs. Virginia)판결에서 주간 여행에 있어 모든 터미널이나 편의시설에서 흑백 분리에 대한 금지를 결정한 1946년 모건 대 버지니아 (Morgan vs. Virginia)판결을 더욱 확대하였다.
CORE 구성원들은 이러한 법원의 명령이 잘 시행되는지 살펴보기로 결정했고, 1947년의 화해의 여행을 모델로 하였다. 1961년 파머의 계획은 남부의 흑백분리에 반대하는 흑백의 혼성집단을 구상했고 자유여행단은 딥 사우스(Deep south)의 터미널 식당과 대기실, 화장실에서 실행되고 있는 짐 크로 법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들은 체포될 경우 벌금이나 보석보다는 감옥에 남아있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운동의 전개

이 자유여행단은 그 계획을 실행함에 있어 2단계 국면을 거쳤다. 첫 번째는 CORE의 주도로 여행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 알라바마에서 백인들의 폭력으로 여행단이 해체된 것이고, 두 번째는 학생비폭력협력위원회(SNCC)의 주도로 또 다른 여행이 진행되고 있을 때 백인들의 직접적인 폭력과 더불어 정치적인 제재가 가해진 것이다.
1961년 5월 4일, 7명의 흑인들과 6명의 백인들의 혼성 집단은 버스에 올라 위싱턴을 출발하여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를 평화스럽게 통과하였지만, 5월9일 처음으로 백인들에 의한 폭력사건이 발생하였다.
5월 14일, 13명의 운동원들이 2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아틀란타에서 버밍햄으로 여행을 계속하였으나, 한 대의 버스는 알라배마의 애니스턴(Anniston)에서 백인 폭도들에게 공격당한 후 전소되었고, 다른 버스에 승차했던 운동원들은 역시 백인들에게 폭행 당하였다.
5월17일, CORE가 후원하는 자유여행단은 해산하게 되었지만, 아틀란타와 내쉬빌에서 SNCC지도자들은 폭력이 비폭력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몇몇 연좌농성에 참가하였던 자들을 소집하여 2차 자유여행을 시행하게 되었다.

운동의 전개

하지만 그곳에서 8명의 흑인들 및 2명의 백인 여행단은 체포되어 보호구금에 처해졌고 다음 날 자정, 경찰은 이들을 150마일 떨어진 테네시와 알라바나주 경계선으로 데려다 놓았다.
학생들은 바로 버스터미널로 되돌아가 몽고메리로의 여행 방법을 모색하여 18시간 후 아틀란타와 내쉬빌에서 새로운 지원자들로 증가된 21명의 자유여행단원들이 5월 20일 이른 아침 몽고메리로 가기 위해 버스에 합승하여 여행을 계속하였다. 처음 2시간 여 동안은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무장한 백인들에 의해 구타가 자행되었고 폭도들은 천여 명 이상 증가하였다.
이러한 백인 폭도들의 폭력과 알라배마 당국의 무신경은 자유여행단을 세계에 알려지게 했고, 이로써 케네디 행정부는 일단의 행동을 취할 필요를 느끼게 되어 정부는 시민들과 재산 보호를 위해 600명의 집행관들을 몽고메리로 파견하였다.

운동의 전개

케네디 행정부가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동안 루터 킹 목사는 몽고메리로 달려가 자유여행단을 격려하였고, 킹 목사와 내쉬빌 학생지도자들은 여행은 지속되는 폭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임을 표명하였다. CORE, SCLC, SNCC와 내쉬빌 기독교 지도자 위원회는 자유여행단 협력 위원회를 구성하고 법무장관인 로버트 케네디의 냉각기를 위한 여행의 중지요청을 거부하였다.
이후 자유여행단 지원자들이 아틀란타와 뉴욕, 뉴올리언즈, 위싱턴 D.C에서 몽고메리에 속속 도착하였다. 5월 24일 방위군에 의해 호위되어 27명의 여행단은 더욱 위험한 미시시피의 잭슨으로 향하였다. 그들이 주 경계선에 다다르자 미시시피 주 방위군이 그들의 호위임무를 이양 받았다. 버스에 있는 모든 운동원들은 심각한 폭력사태를 예견했지만 아무런 폭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27명의 운동원들이 간이 음식점과 화장실에 들어가려 할 때 모두 신속히 체포되었으며 유죄를 선고받아 벌금과 2개월의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지도부는 운동원들 모두가 벌금을 지불하는 것보다 오히려 감옥에 남아있을 것이라 표명하였고 다른 지원자들에게 잭슨 시의 감옥이 가득차 넘칠 때까지 비정치적인 흑백분리의 법령에 대항하자고 격려하였다.

운동의 전개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다양한 연령의 각지에서 온 천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유여행단에 참여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젊은 흑인이고 남부인들 이었다. 이들 중 300명 이상이 잭슨 시의 감옥에 수감되었고 아칸사스, 플로리다, 루이지아나, 텍사스에서는 50명 이상 수감되었다.

운동의 영향

이러한 연속적인 사태는 연방정부의 법 제정을 재촉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였고, 자유여행단의 활동은 어떠한 시위보다 백인과 비 남부인들을 크게 확장된 흑인들의 직접행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유발하였으며, 민권운동이 단지 차별과 분리의 철폐라는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민감한 정치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켜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