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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사건 배경

1976년 3월 24일 아르헨티나에서는 육군ㆍ해군ㆍ공군 참모총장이 주동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사벨 페론 정권을 무너뜨렸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쿠데타를 지지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사회적ㆍ정치적ㆍ경제적 불안은 이사벨 페론 정권의 부패와 무능력 탓이며, 강력한 군부의 개입만이 사회 혼란을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군부의 개입을 환영한 것이다. 그러나 사태의 전개는 시민들의 기대와 어긋나기 시작했다. 무고한 시민들이 체포되고, 살해되고, 실종되었다. 손쉬운 안정을 희망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되려 역사상 최악의 정권을 자초하였고, 군사정권 내내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실제로 쿠데타 직전의 아르헨티나 사회는 극도로 불안정했다. 극좌ㆍ극우의 도시 게릴라 단체들이 준동하였고, 폭파ㆍ납치ㆍ살해ㆍ폭력사태가 빈발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도시 게릴라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1970년이다. 행정ㆍ입법권을 틀어쥔 옹가니아(Ongania) 장군이 철권통치를 하던 1970년 5월 19일, 무장단체 ‘유격대’(Montoneros)가 1955년 페론 정권을 전복한 아람부루 장군을 납치하여 총살한 사건을 시작으로 ‘인민혁명군(ERP Ejercito Revolucionario del Pueblo) 등 게릴라 단체들이 등장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우익은 ‘AAA"라는 사조직을 결성하여 번호판 없는 포드 팰컨 차량을 타고 다니며 게릴라로 의심되는 사람은 제거하였는데, 1975년 말까지 희생자는 약 1천5백명을 헤아렸다.

1974년 7월 1일 후안 도밍고 페론의 사망하자 부통령이던 이사벨 페론이 권력을 승계하였다. 그러나 좌?우익의 갈등은 더욱 극심해졌으며, 경제 사정 또한 악화되어 인플레이션은 3백 퍼센트에 이르렀다. 이사벨 페론은 새 내각을 구성하여 화폐를 개혁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사회 불안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 이사벨 페론은 남편만큼의 카리스마도 없었고, 에바 페론만큼의 대중적인 지지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정 장악에 실패했으며, 결국에는 쿠데타 군에게 권력을 찬탈당하였다.

1930년 이래 아르헨티나에서 빈번하게 쿠데타가 발생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명시적이건 묵시적이건 이에 동조하고 후원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실제로 1973년 쿠데타는 군부, 보수적인 카톨릭 교회, 대농장 소유주들의 합작품이었다. 이 세력들은 이데올로기적이고 경제적인 이해 관계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노동자와 도시 빈민 등 민중부문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배제하려고 하였다. 반면에 페론주의자들은 민중부문을 정치적 지지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노동자와 빈민들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0세기 아르헨티나의 파란 많은 정치사는 군부가 대표하는 보수세력과 노동조합이 대표하는 민중부문이 상호 배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의 표출이며, 이러한 정치 변동의 부산물이 바로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경제 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