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관점에서 본 칠레약사
칠레 역사 전반에 걸쳐 정치적 억압, 국가에 의해서 저질러진 정치적 폭력, 즉 인권 탄압에 대한 처계적 정보는 많지 않다. 인권 탄압에 대한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1810년 독립과 더불어 시작되는 공화국 시기에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16세기 초반(1541년)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원주민에 대한 심한 공격이 끊임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는 있다. 아이마라(aymara), 마뿌체(mapuche), 라빠 누이(rapa nui) 같은 원주민 부족들은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했고, 어떤 경우에는 멸종되기도 했는데, 남미 대륙 최남단에 거주했던 알라깔루페스(alacalufes), 야가네스(yaganes), 오나스(onas) 부족들이 바로 그들이다.
독립 이후 칠레에서 발생한 인권 탄압의 역사 중에서 가장 최악의 사례는 사회주의 정당의 대표로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던 살바도르 아옌데를 유혈 구테타를 통해 축출하고 등장한 피노체트 군사 정권이 저지른 독재였다.
칠레의 역사에서 언론의 자유, 정당 참여의 권리, 청원의 권리, 결사의 자유, 법적으로 보호받을 권리 등이 이 시기처럼 오랫동안 위태로웠던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의 역사에서 피노체트가 저지른 독재 상황이 유일한 예외적 상황이 아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약 100년 동안의 칠레의 근대 역사를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16세기 초반(1541년)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원주민에 대한 심한 공격이 끊임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는 있다. 아이마라(aymara), 마뿌체(mapuche), 라빠 누이(rapa nui) 같은 원주민 부족들은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했고, 어떤 경우에는 멸종되기도 했는데, 남미 대륙 최남단에 거주했던 알라깔루페스(alacalufes), 야가네스(yaganes), 오나스(onas) 부족들이 바로 그들이다.
독립 이후 칠레에서 발생한 인권 탄압의 역사 중에서 가장 최악의 사례는 사회주의 정당의 대표로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던 살바도르 아옌데를 유혈 구테타를 통해 축출하고 등장한 피노체트 군사 정권이 저지른 독재였다.
칠레의 역사에서 언론의 자유, 정당 참여의 권리, 청원의 권리, 결사의 자유, 법적으로 보호받을 권리 등이 이 시기처럼 오랫동안 위태로웠던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의 역사에서 피노체트가 저지른 독재 상황이 유일한 예외적 상황이 아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약 100년 동안의 칠레의 근대 역사를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80-1920 : 민중 배제의 시기
이 시기에 다양한 사회적 집단의 이해 관계가 얽힌 정치적 협상의 과정에서 민중들이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되었다. 1900년부터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집단 행동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했으나 자유주의 국가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이고 정치적 참여에서 그들을 배제시켰다. 자본과 노동 관계를 규율하는 노동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타협의 통로가 없는 사회적 갈등은 정부에 대한 극단적 반대와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군대가 진압에 동원되었고 희생자의 수도 많았다.
1920-1970 : 국민적 통합의 시기
이 시기는 민주적 체계를 지향하는 정부가 다양한 사회적 집단의 이해 관계의 협상을 통해 국민 통합을 시도한 시기로 볼 수 있다.
민중들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한 주된 도구는 노동조합과 선거였다. 정부는 자본과 노동 관계를 입법화하려고 시도했다. 이 시기에도 몇몇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경찰과 군대가 민중의 시위를 억압하는데 동원되었다. 그러나 충돌에서 발생하는 희생자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 두 시기에 발생한 중요한 인권 탄압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민중들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한 주된 도구는 노동조합과 선거였다. 정부는 자본과 노동 관계를 입법화하려고 시도했다. 이 시기에도 몇몇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경찰과 군대가 민중의 시위를 억압하는데 동원되었다. 그러나 충돌에서 발생하는 희생자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 두 시기에 발생한 중요한 인권 탄압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1903년 발파라이소(Valparaiso)
급료 인상을 요구하며 부두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경찰과 노동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5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다쳤다. - 1905년 산티아고
수입된 아르헨티나 축산품에 대한 세금을 노동자들이 거부함으로써 촉발된 대규모 시위에서 약 70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했다. 이 사건은 “핏빛 주말”(semana roja)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 1907년 이끼께(Iquique)
칠레 북부에 위치한 사막의 초석 광산 노동자들이 노동과 거주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이 이끼께의 항구도시에 있는 산타마리아 학교에 집결하자 정부는 학교를 봉쇄했다. 곧 이어 위수령을 선포하고 노동자들과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된 가족들을 향해 발포했다. 학살의 결과는 2000명의 사망자였다. - 1921년 안또파가스따(Antofagasta)
정부는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며 산그레고리오(San Gregorio)의 초석 광산 사무실에서 벌어진 파업을 진압했다. 22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 1925년 라꼬루냐(La Coruna)
아루뚜로 알레산드리(Arturo Alessandri) 대통령의 통치기간에 이끼께 근처의 라꼬루냐의 초석 광산에서 발생한 파업은 수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후 끝이 났다. 2000명 이상의 파업 노동자들이 칠레 남쪽의 변방으로 쫓겨났다. 이때 국방장관이었던 까를로스 이바녜스 델 깜뽀(Carlos Ibanez del Campo) 장군은 후에 두 번에 걸쳐 대통령이 되었다. - 1938년 산티아고
일단의 젊은이들이 모네다 대통령궁에 인접한 노동보험의 건물을 점거했다. 군대에 진압된 후 약 63명의 젊은이들이 처형되었다. - 1946년 산티아고
불네스 광장에서 벌어진 전국적인 시위에서 경찰의 진압으로 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 1957년 산티아고
학생들이 시작했으나 나중에 노동자들과 도시 소외계층민들이 합류한 시위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21명이 사망했다. - 1960년 산티아고
전국적인 시위의 과정에서 산티아고 남부의 호세 마리아 까로(Jose Maria Caro) 마을 주민들이 기차의 통과를 가로막고 항의하던 중 군대의 진압으로 6명의 주민이 사망했다. - 1966년 엘살바도르(El Salvador)
칠레 북부의 구리 광산에서 발생한 장기 파업에서 엘살바도르의 노동조합 본부를 점거한 노동자들이 해산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고 8명이 사망했다. - 1969년 뿌에르또 몬뜨(Puerto Montt)
토지 문제로 시위하던 주민들을 경찰이 해산하는 과정에서 9명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