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SKIP TO CONTENTS)

크메르루즈 정권의 주요 정책

크메르루즈 정권의 주요 정책

1975년 4월 폴포트를 중심으로 한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접수하였다. 대부분 어린 소년들이었던 크메르루즈 군대는 베트남 스타일의 군복을 착용하고, 근엄하면서도 진지한 모습으로 프놈펜에 입성하였다. 시민들은 이들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이제 내전은 끝나고, 평온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프놈펜 거리를 가득 메우고 크메르루즈 군대를 환영했던 것이다.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장악한 후 가장 먼저 수행한 일은 경제를 공산화하는 것이었다. 먼저 기존에 사용하던 화폐를 전부 금지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동생활을 요구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공동생활은 성(性)에 따라 숙소를 분리시키고, 아이들은 부모의 곁을 떠나 그들만의 독립된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거의 가족 관념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고, 결혼도 크메르루즈 정권의 지시 하에 이루어졌다.
가족단위는 천 가구를 기준으로 하는 집산주의로 대체되었다. 이는 크메르루즈 정권이 몰락한 이후 이혼율이 급속하게 높아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또한 학교는 폐쇄되었으며, 혁명에 불필요한 80%의 서적들이 폐기되었다.

대중가요나 문화의 경우에도 과거에 유행했던 것들이 모두 금지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당시 캄보디아에서 매우 유명한 가수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Sin Sisamuth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1960년대 말 시아누크 국왕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할만큼 캄보디아에서는 매우 유명한 대중가수였고, 그의 노래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애창되고 있다. 그는 뚤슬렝에 수감되었다가 끝내 살해되었다. 또한 혁명지도부는 시장, 종교조직, 학교, 사유재산, 그리고 이동의 자유도 일거에 철폐하였다. 크메르루즈 정권은 일시에 사람들에게 과거와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커다란 변화는 이른바 “도시 비우기 정책(Cleansing the Cities)”이었다.
이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를 농촌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도시민을 농촌으로 추방하는 정책은 크메르루즈가 프놈펜 점령하기 수개월 전에 당 지도부에 의해 결정된 사안이었는데, 그 배후엔 몇 가지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첫째, 당시 프놈펜은 각 지방에서 2백만 이상으로 추정될 만큼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급속하게 인구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곧 식량의 절대적 부족을 초래하였다. 당시 크메르루즈 군은 이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갖고 있지 않았고, 혁명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 이상의 도시민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묘책도 없었기 때문에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혁명 지도부 인사들의 안정성이 고려되었다고 한다. 크메르루즈 군대는 오랫동안 지하활동을 해왔고, 산악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었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노출되는 도시 생활에 불안해했으며, 자신들을 은폐하고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 방법을 선택했다고 한다.

셋째, 혁명 지도부가 도시를 반혁명의 토양과 혁명의 장애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반혁명의 온상인 도시를 전면적으로 바꿈으로써 혁명정권의 기반을 다지려 했다. 이를테면 도시에 자본주의의 스파이들이 숨어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잔재를 뿌리뽑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정책으로 도시민의 농촌 이주 정책이 선호되었던 것이다.
또한 도시에 CIA와 베트남, KGB 등에서 파견된 스파이들과 정보원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는데, 당시 크메르루즈 정권에게는 이들을 찾아낼 수 있는 여력과 장비를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도시 비우기 정책은 비단 프놈펜에서만 진행되었던 것이 아니라, 바탐방, 깜뽕톰 등에서도 실시되었다. 결국 도시는 크메르루즈 정권의 수뇌부이거나 뚤슬렝 감옥과 같이 국민들을 수감하거나 취조하던 시설들의 간수들 및 죄수들 그리고 크메르루즈 정권의 간부들 가운데 재교육이 필요한 사람들만이 남았다. 그 결과 1979년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하자, 프놈펜 근처에 있던 사람들부터 하나둘 프놈펜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무 집에서 기거하면서, 소유권을 행사했다. 따라서 진짜 집주인이 돌아오면 갈등이 발행하였으나, 문서가 다 소실되어버렸으므로, 달리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캄보디아 내의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다. 또한 최근에는 실력자들이 주민들을 상태로 강제로 땅을 빼앗거나 크메르어를 잘 모르는 소수민족을 상대로 상기행각을 벌여 땅을 빼앗는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다.
도시 비우기 정책은 1975년 4월 중순부터 실시되었는데, 이 때는 가장 좋지 않은 기후조건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이 정책이 시행되던 4월은 건기여서 마실 수 있는 물과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림과 허기, 말라리아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강제 이동에 반하는 자는 당의 명령을 거부한 죄로 처형되었고, 심지어 병원의 환자는 물론, 어린이, 노약자들도 강제 이동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동 중에 죽어갔다.

이렇게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주해간 사람들을 “머누 트마이(New People)”라고 불렀고, 원래 농촌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머누 짜(Old People)”라고 불렀다. New People들은 익숙하지 않고, 낯설은 농사일이지만 자본주의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미명아래 더 힘들게 일해야만 했다.
이들은 심지어 소가 하던 일을 대신하기도 했으며, 더 많은 교양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또 더 심각한 간섭과 감시 속에서 살아야만 했고, 작은 일에도 꼬투리가 잡혀 살해되거나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병과 강제노역에서 죽어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가족 구분 없이 남자는 남자들끼리, 여자는 여자들끼리 또 어린이는 어린이들끼리 모여서 살아야만 했다. 아이들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는 교육 프로그램에 의해 교육받았고, 부모에게 스며있는 구체제의 정신과 의식을 감시하는 역할도 부여되었다.
도시민을 농촌으로 이주시킨 것은 크메르루즈 정권이 추구했던 농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개발의 일환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방식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 이 계획은 구 소련의 “집단 농장제도”와 중국의 “대약진 운동”,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혼합한 농업생산 증진 전략들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어쨌든 이 계획에 의하면, 모든 캄보디아의 농토를 집단농장화하고,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키며, 여기에서 형성된 잉여 생산물을 수출하여 얻은 이익금으로 1차 경공업을 육성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는 중공업을 발전시켜 세상에서 하나뿐인 완전한 자립국가를 만들어 1980년까지는 모든 사람이 매일 휴식을 즐기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크메르루즈 정권은 농민의 자급자족과 3모작이 가능하도록 관개체계를 개선하고, 모든 경제사회활동을 농업국가로의 전화정책에 예속시켰다.

이때 특히 영향을 많이 준 것은 중국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때에 등장한 급진적인 모택동 정책 노선이었다. 이는 친중관계를 강화하고 베트남의 영향력을 감소하고자 했던 크메르루즈 정권의 대외정책과 맥이 닿아 있었다. 캄보디아는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중국이라는 창구를 통해 해결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대가로 모택동은 캄보디아 인민의 투쟁을 위한 모든 지원을 약속하였다.
한편 캄보디아는 반베트남 인종주의 정책을 강화하였다. 반베트남 정책은 캄보디아가 오랫동안 갖고 있던 베트남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이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캄보디아는 수 차례에 거쳐 베트남과 전쟁을 벌였고, 이것은 베트남을 비롯하여 외세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감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폴포트 정권은 과거의 캄보디아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을 침공하는 등 반베트남 민족주의를 정책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반베트남과 친중정책은 폴포트 정치 이데올로기의 한 축이면서, 동시에 이와 다른 입장과 세력들을 숙청하고 견제하는 전술로 이용되었다. 또한 폴포트 정권은 이 지역에서 중국과 소련간의 패권경쟁 및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RV)의 팽창정책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발전과 국방력 강화를 강조했다.
결국 이러한 정책들은 공산당에 반대하는 우파 크메르루즈 민족주의자, 극단적인 혁명정책에 반대하는 크메르루즈 탈당자, 캄보디아 내 베트남인들의 저항과 비난 등으로 캄보디아 정국은 불안해지고, 수많은 난민이 태국과 베트남으로 탈출함에 따라, 국경분쟁을 촉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베트남은 바로 이러한 정황을 이용하여 폴포트를 반대하고 베트남으로 탈주해온 헹삼린 세력을 규합하여 크메르루즈 정권을 붕괴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