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신질서체제
인도네시아는 구네덜란드의 식민지를 거의 그대로 접수하여 한반도의 8.5배에 달하는 1만 3,677개의 섬에 풍부한 자원과 l억 8,5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강대한 나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독립을 선언한 인도네시아는 그 후 네덜란드에 대한 4년 동안의 독립전쟁을 거쳐 1949년에 주권을 획득했으며 l950년에 수카르노는 대중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면서 인도네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59년께 수카르노는 "지도되는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거국일치체제를 구축하고 대외적으로는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의 구호 아래 사회주의국들과의 연계를 심화시켜 서방측과 대립관계에 서게 되는데, 과감한 대외정책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인도네시아 경제는 악화의 일로를 치달았고 극심한 인플레에 국민의 불만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국군과 이슬람교도 대 공산당의 대립이 격화하여 고도의 정치적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1965년 수카르노의 친위대장이 이끄는 좌익쿠데타가 일어났다. 이것은 당시 전략예비군 사령관이었던 수하르토 소장의 역쿠데타에 의해 곧 실패로 끝났으며, 수하르토는 사건의 모든 책임을 공산당에 뒤집어씌워 공산당원 및 그 동조자와 가족들 1백만(50만이라고도 한다) 명을 학살한 후, 1968년 정식으로 정권을 잡았다.
대통령이 된 수하르토는 신질서라는 슬로건 아래 피폐된 경제재건과 발전을 지상과제로 하여, 서방에 투자와 원조를 요청했고 동시에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국군에 국내 치안을 담당케 하여 강력하고도 교묘한 관리지배를 구축했다. 신질서체제는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관료기구와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는 치안관리집단(군)을 두 개의 기둥으로 삼는다.
신질서체제에 있어서 군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인도네시아군은 독립전쟁의 경험이 있고 지방반란을 진압하여 나라의 통일을 유지해왔다는, 그리고 빈사상태에 있던 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켰다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국군은 의회에 1백 명의 임명의원을 내고 중앙과 지방의 많은 요직을 차지한다.
인도네시아의 CIA인 국가정보 조정본부, 군첩보기관인 전략정보본부, 국가안정유지조정청 등이 정보 . 치안 부문을 지배함은 물론, 국군엘리트들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의회, 내각, 관료기구를 초월하는 의사결정 서클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군은 일상적인주민관리도 한다. 군사령부는 도 .군 . 읍 . 면 . 리의 행정구에 거의 대응하여 설치되고 있으며, 각각의 수준에서 문민행정과 함께 (혹은 그것을 주도하여) 나라 정책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반대자에게는 가차없는 탄압을 가한다. 이러한 체제는 군에 의한 극단적인 횡포를 일상적으로 낳게 마련이다. 수하르토 정권이 "군사정권"이라고 불리는 것은 층분한 이유가 있는 일이다.
또한 신질서체제는 1억 8천만 국민이 공통의 이데올로기를 갖도록 철저한 사상교화를 하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젊은 민족주의자 수카르노가 일본의 점령시대에 독립준비위원회에서 제안했던 것으로서 "판치샬라 (건국의 5원칙)라 불리며 형행헌법 전문에 실려있다.
곧 ①유일신에의 신앙 ②인도주의 ③인도네시아의 통일 ④협의에 의한 민주주의 ⑤사회정의를 그 내용으로 하는 이것은 수카르노 시대에는 슬로건이었으나, 수하르토시대에는 "국가이데올로기"로서 이로부터의 일탈은 반국가적 행위로 규정되며 "반국가전복법"(최고형 사형)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
동티모르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많은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 종교인 등이 이 5원칙에 의하여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독립을 선언한 인도네시아는 그 후 네덜란드에 대한 4년 동안의 독립전쟁을 거쳐 1949년에 주권을 획득했으며 l950년에 수카르노는 대중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면서 인도네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59년께 수카르노는 "지도되는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거국일치체제를 구축하고 대외적으로는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의 구호 아래 사회주의국들과의 연계를 심화시켜 서방측과 대립관계에 서게 되는데, 과감한 대외정책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인도네시아 경제는 악화의 일로를 치달았고 극심한 인플레에 국민의 불만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국군과 이슬람교도 대 공산당의 대립이 격화하여 고도의 정치적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1965년 수카르노의 친위대장이 이끄는 좌익쿠데타가 일어났다. 이것은 당시 전략예비군 사령관이었던 수하르토 소장의 역쿠데타에 의해 곧 실패로 끝났으며, 수하르토는 사건의 모든 책임을 공산당에 뒤집어씌워 공산당원 및 그 동조자와 가족들 1백만(50만이라고도 한다) 명을 학살한 후, 1968년 정식으로 정권을 잡았다.
대통령이 된 수하르토는 신질서라는 슬로건 아래 피폐된 경제재건과 발전을 지상과제로 하여, 서방에 투자와 원조를 요청했고 동시에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국군에 국내 치안을 담당케 하여 강력하고도 교묘한 관리지배를 구축했다. 신질서체제는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관료기구와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는 치안관리집단(군)을 두 개의 기둥으로 삼는다.
신질서체제에 있어서 군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인도네시아군은 독립전쟁의 경험이 있고 지방반란을 진압하여 나라의 통일을 유지해왔다는, 그리고 빈사상태에 있던 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켰다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국군은 의회에 1백 명의 임명의원을 내고 중앙과 지방의 많은 요직을 차지한다.
인도네시아의 CIA인 국가정보 조정본부, 군첩보기관인 전략정보본부, 국가안정유지조정청 등이 정보 . 치안 부문을 지배함은 물론, 국군엘리트들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의회, 내각, 관료기구를 초월하는 의사결정 서클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군은 일상적인주민관리도 한다. 군사령부는 도 .군 . 읍 . 면 . 리의 행정구에 거의 대응하여 설치되고 있으며, 각각의 수준에서 문민행정과 함께 (혹은 그것을 주도하여) 나라 정책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반대자에게는 가차없는 탄압을 가한다. 이러한 체제는 군에 의한 극단적인 횡포를 일상적으로 낳게 마련이다. 수하르토 정권이 "군사정권"이라고 불리는 것은 층분한 이유가 있는 일이다.
또한 신질서체제는 1억 8천만 국민이 공통의 이데올로기를 갖도록 철저한 사상교화를 하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젊은 민족주의자 수카르노가 일본의 점령시대에 독립준비위원회에서 제안했던 것으로서 "판치샬라 (건국의 5원칙)라 불리며 형행헌법 전문에 실려있다.
곧 ①유일신에의 신앙 ②인도주의 ③인도네시아의 통일 ④협의에 의한 민주주의 ⑤사회정의를 그 내용으로 하는 이것은 수카르노 시대에는 슬로건이었으나, 수하르토시대에는 "국가이데올로기"로서 이로부터의 일탈은 반국가적 행위로 규정되며 "반국가전복법"(최고형 사형)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
동티모르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많은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 종교인 등이 이 5원칙에 의하여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